케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케빈에 대하여, 2011)

카테고리 없음 2023. 6. 27. 14:33

케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케빈에 대하여, 2011)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20대 중후반, 인생의 과도기에 서있기 때문일까? 개명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주변인들을 종종 발견한다. 왕이 죽고나서 정해지는 묘호가 아니니, 이름이 사람의 삶을 정의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름의 의미를 따지고, 개명을 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만큼 사람의 이름은 꽤나 중요한 무엇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지는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마치 묘호처럼 모든 촬영이 끝난 후에 정해지는 영화 제목이야 오죽할까. 영화의 제목은 (아마 고심 끝에 지어졌다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게 분명하다. 적어도 '슈퍼맨'에 배트맨이 등장하진 않겠지.

  그렇다면, 오늘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직역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해요.’ 정도이려나. 만약 케빈이라는 소년의 모험을 다룬 판타지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 이야기’ 정도가 되었어야 했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케빈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정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 ‘케빈의 모험’이나 ‘케빈의 일대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자’이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를 축약하지 않는다. 제목은 말을 걸고 있다. 우리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다만 주의하자. 케빈에 대하여 말해본다는 것은 케빈이라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말은 아니다. 케빈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케빈의 존재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케빈에 대하여 말하려면 그의 존재라는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기 케빈이라는 괴물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새 책이 나오면 사인회를 할 정도로 꽤 유명한 여행가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케빈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 물론 그녀도 여러 번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첫 번째 의미를 가진다.

  에바와는 달리 에바의 남편도, 두 번째 자녀인 딸도 케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면 그녀의 남편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고, 에바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뿐이다. 그녀의 딸 역시 케빈을 졸졸 쫓아다니며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즐거워한다. 에바는 분명히 케빈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에게, 딸에게 분명히 전달하지 못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다. 그러다 덜컥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케빈을 낳고 기르며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케빈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지 않는지 그녀는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마음의 안식처로 만든 자신의 방에 물총을 난사한 케빈 앞에서 화를 참지 못했던 장면, 이것이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의심을 불러오는 보다 원천적인 기제, 바로 엄마에게 주어지는 애정과 모성의 역할이다. 차라리 도로 공사장 소음에 기대어 아이의 울음소리로부터 안식을 얻는 장면,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며 답답함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장면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모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성의 역할과 행동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 분명하지만 말할 수 없는 괴리가 그녀의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한 의심과 괴리로 에바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수도 없이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케빈은 살인을 저지른다. 자물쇠로 문을 잠궈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활을 난사한다. 학교에서 일을 치르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도 죽인다. 오직 에바만이 살아남는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에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살인의 이유가 에바가 아닌 것은 그녀가 괴물을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바가 비록 양육에 서투르고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순 없었지만, 케빈을 괴물로 길러낸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살인의 이유가 에바인 것은 그녀가 케빈의 정체를 의심하고 경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심과 괴리에 묶여 케빈에 대하여 정확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케빈의 살인 사건 이후 그녀의 사회적 삶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사인회를 하던 유명한 여행가는 여행사 잡무 일자리에도 송구해하며, 이웃의, 피해자 가족의, 직장동료의 모욕적인 행동에도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케빈 문제를 제외하곤 특별한 부부싸움 조차 하지 않았던 남편도, 그녀를 잘 따랐던 씩씩한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그 당시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케빈의 답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원천인 에바의 사회적 성공, 따뜻한 가족인척하려는 상투적인 저녁 식사, 억지로 즐거운척하는 여가활동까지, 케빈은 에바의 모든 행동을 우습게 여겼다. 그녀의 그러한 세상을 비웃고자, 무너뜨리고 승리하고자 그는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너뜨렸지만 승리하지는 못했다. 에바가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며 그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케빈은 절대 알 수 없다.

  에바는 오히려 케빈의 살인 사건으로 자기 안의 의심과 자기 안팎의 괴리를 떨쳐낸다. 아니 떨쳐낸다기 보단 의심할 필요가 없고 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모성 아닌 모성을 발견한다. 그것에는 모성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그리고 책임은 빨간색 페인트로, 길에서 마주치는 피해자로 계속 바뀌어가며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녀가 묵묵히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 피해자 가족이 으깨놓은 계란으로 스크램블을 해먹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새로 발견한 모성 아닌 모성,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는 책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따라가며 에바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은 관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은 에바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책임이 자신의 것인 마냥 짊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욕당하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연 그녀에게 양육의 책임을 돌려야 하는가? 그녀에게 지워진 책임은 정말 그녀의 책임인가? 우리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앉아서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영화이다. 카메라는 에바를 따라다니지만 절대 그녀를 편들진 않는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어머니라고 하기엔 미흡한 존재, 아이를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형식적인 모자 외출에 흡족해하는 모습은 낯설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책임 속에 살아가는 에바를 바라보는 것이 통쾌하지도 않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 걸음걸이,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조심스러운 관찰, 일어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 역시 안쓰럽고 피곤하다. 그렇게 상영시간 내내 우리는 에바의 삶으로 시달리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피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피로는 이제 우리의 삶으로 이식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모성을 되묻는 것 이상의 질문을 영화는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진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바라보고 마주하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에바가 마주하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과, 에바가 마주하고 버티어내는 케빈의 진실은 우리가 분유(分有)하고 있는 진실이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다가온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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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와 같아 보이는데, 엄마 혼자 살아남았다는 점, 어렸을 때 부모의 성행위를 발견했다는 부분에선 얼추 맞아떨어지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케빈이 벌인 살인의 목적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엄마와의 경쟁과 승리에 더 가깝고. 결국 이 영화에서 케빈은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케빈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

  (확실히 힘든 영화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조금 쉬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느니 하는 쉬운 평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12:00에서 12:01로 넘어가는 자명종 시계다.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 아, 힘들다고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 후의 일과를 짜두면 알차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케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케빈에 대하여, 2011)

카테고리 없음 2013. 4. 17. 10:55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20대 중후반 무렵, 인생의 과도기에 서있다 보니 주변에 개명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사후에 붙여지는 묘호도 아니고 삶을 시작할 때 붙이는 사람 이름인데도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고들 한다. 물론 철학관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정도로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 이름이 그러할진대, 촬영을 다 끝내고서 확정되는 영화 제목이야 오죽할까. 그만큼 제목은 영화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간단하게 ‘슈퍼맨’에서 배트맨을 보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직역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해요.’ 정도이려나. 만약 케빈이라는 소년의 모험을 다룬 판타지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 이야기’ 정도가 되었어야 했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케빈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정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 ‘케빈의 모험’이나 ‘케빈의 일대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자’이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를 축약하지 않는다. 제목은 말을 걸고 있다. 우리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다만 주의하자. 케빈에 대하여 말해본다는 것은 케빈이라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말은 아니다. 케빈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케빈의 존재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케빈에 대하여 말하려면 그의 존재라는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기 케빈이라는 괴물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새 책이 나오면 사인회를 할 정도로 꽤 유명한 여행가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케빈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 물론 그녀도 여러 번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첫 번째 의미를 가진다.

에바와는 달리 에바의 남편도, 두 번째 자녀인 딸도 케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면 그녀의 남편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고, 에바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뿐이다. 그녀의 딸 역시 케빈을 졸졸 쫓아다니며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즐거워한다. 에바는 분명히 케빈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에게, 딸에게 분명히 전달하지 못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다. 그러다 덜컥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케빈을 낳고 기르며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케빈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지 않는지 그녀는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마음의 안식처로 만든 자신의 방에 물총을 난사한 케빈 앞에서 화를 참지 못했던 장면, 이것이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의심을 불러오는 보다 원천적인 기제, 바로 엄마에게 주어지는 애정과 모성의 역할이다. 차라리 도로 공사장 소음에 기대어 아이의 울음소리로부터 안식을 얻는 장면,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며 답답함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장면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모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성의 역할과 행동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 분명하지만 말할 수 없는 괴리가 그녀의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한 의심과 괴리로 에바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수도 없이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케빈은 살인을 저지른다. 자물쇠로 문을 잠궈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활을 난사한다. 학교에서 일을 치르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도 죽인다. 오직 에바만이 살아남는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에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살인의 이유가 에바가 아닌 것은 그녀가 괴물을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바가 비록 양육에 서투르고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순 없었지만, 케빈을 괴물로 길러낸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살인의 이유가 에바인 것은 그녀가 케빈의 정체를 의심하고 경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심과 괴리에 묶여 케빈에 대하여 정확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케빈의 살인 사건 이후 그녀의 사회적 삶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사인회를 하던 유명한 여행가는 여행사 잡무 일자리에도 송구해하며, 이웃의, 피해자 가족의, 직장동료의 모욕적인 행동에도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케빈 문제를 제외하곤 특별한 부부싸움 조차 하지 않았던 남편도, 그녀를 잘 따랐던 씩씩한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그 당시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케빈의 답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원천인 에바의 사회적 성공, 따뜻한 가족인척하려는 상투적인 저녁 식사, 억지로 즐거운척하는 여가활동까지, 케빈은 에바의 모든 행동을 우습게 여겼다. 그녀의 그러한 세상을 비웃고자, 무너뜨리고 승리하고자 그는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너뜨렸지만 승리하지는 못했다. 에바가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며 그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케빈은 절대 알 수 없다.

에바는 오히려 케빈의 살인 사건으로 자기 안의 의심과 자기 안팎의 괴리를 떨쳐낸다. 아니 떨쳐낸다기 보단 의심할 필요가 없고 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모성 아닌 모성을 발견한다. 그것에는 모성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그리고 책임은 빨간색 페인트로, 길에서 마주치는 피해자로 계속 바뀌어가며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녀가 묵묵히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 피해자 가족이 으깨놓은 계란으로 스크램블을 해먹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새로 발견한 모성 아닌 모성,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는 책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따라가며 에바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은 관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은 에바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책임이 자신의 것인 마냥 짊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욕당하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연 그녀에게 양육의 책임을 돌려야 하는가? 그녀에게 지워진 책임은 정말 그녀의 책임인가? 우리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앉아서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영화이다. 카메라는 에바를 따라다니지만 절대 그녀를 편들진 않는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어머니라고 하기엔 미흡한 존재, 아이를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형식적인 모자 외출에 흡족해하는 모습은 낯설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책임 속에 살아가는 에바를 바라보는 것이 통쾌하지도 않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 걸음걸이,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조심스러운 관찰, 일어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 역시 안쓰럽고 피곤하다. 그렇게 상영시간 내내 우리는 에바의 삶으로 시달리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피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피로는 이제 우리의 삶으로 이식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모성을 되묻는 것 이상의 질문을 영화는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진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바라보고 마주하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에바가 마주하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과, 에바가 마주하고 버티어내는 케빈의 진실은 우리가 분유(分有)하고 있는 진실이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다가온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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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와 같아 보이는데, 엄마 혼자 살아남았다는 점, 어렸을 때 부모의 성행위를 발견했다는 부분에선 얼추 맞아떨어지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케빈이 벌인 살인의 목적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엄마와의 경쟁과 승리에 더 가깝고. 결국 이 영화에서 케빈은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케빈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

(확실히 힘든 영화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조금 쉬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느니 하는 쉬운 평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12:00에서 12:01로 넘어가는 자명종 시계다.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 아, 힘들다고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 후의 일과를 짜두면 알차게 영화를 볼 수 있다.)

 

블로그 시작.

잡담 2012. 3. 26. 23:24

  여행을 다니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이 현재 제가 주로 하는 일인데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엔 허무한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유형의 무엇으로 남겨보고자 시작합니다. 페이스북을 하는 시간을 없애고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활용하여 글을 쓰고 업로드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작년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고, 올해도 쓴다쓴다 하면서 SNS에 남기는 등, 형식을 갖춘 글을 거의 쓰지 않아서) 처음엔 비문도 있고 어색하고 마무리도 안 되겠지만 차차 쓰다보면 나아지겠지요.

최대 목표는 하루에 하나씩 쓰기. 최소한의 목표는 일주일에 하나씩 쓰기.